‘노력의 아이콘’에서 국가대표까지 성장한 오재현(25, 186cm)의 얘기다. SK 관계자는 이런 말까지 남겼다. “이렇게 노력을 많이 하는 선수는 처음 봤다. (주)희정이가 세계 1등이라면, (오)재현이는 우주 1등이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됐으며, 인터뷰는 2월 6일 진행됐습니다.
2월 3일 KT와의 홈경기에서 아쉽게 패한 후 분해서 눈물 흘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조건 이기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아쉽게 졌다. 다 불태웠는데 결과가 좋지 못해 힘들었다. 경기가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고, 억울했고, 분했다. 내가 마지막 찬스를 놓쳐서 눈물까지 났다. 아쉬움은 코트에서 다 토해냈다. 라커룸에서는 평소와 똑같이 마무리했다.
동점을 노리고 시도했던 마지막 공격이 돌파까진 잘 이뤄졌지만, 레이업슛 마무리가 아쉬웠다.
판단을 잘못했다. 레이업슛을 시도하기 전 샷클락을 보니 1.1초가 남아 있었다. 상대가 팀파울이었기 때문에 블록슛을 시도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띄워놓는 식으로 던졌다. 너무 분해서 코트를 내리쳤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나?
지는 걸 엄청 싫어했다. 농구하기 전 운동회나 달리기 같은 걸해도 지면 난리 나는 성격이었다. 승부욕이 강하다는 걸 최근에 더 많이 느끼고 있다.
부상선수가 많았던 가운데에도 4라운드를 잘 치렀지만, 4라운드 막판부터 5라운드 초반에 걸쳐 연패가 길어지고 있다. 이 기간 자신과 팀의 경기력을 돌아본다면?
4라운드 초반은 위태위태했지만 이기는 경기를 꾸준히 했다. (김)선형이 형, (허)일영이 형이 빠졌지만 남은 멤버들끼리 최선을 다했다. 경기력이 썩 좋진 않았지만 이겼기 때문에 분위기는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경기력은 좋은데 결과가 안 좋다 보니 많이 힘들었다. 나에 대한 좋은 평가도 나왔지만, 형들이 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덕분이었다. 다 함께 이기기 위해 뛰는 건데 팀이 계속 지다 보니 오는 딜레마도 있다. 내 경기력이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팀이 이기는 농구를 하고 싶다.
경기 시작 2시간 30분 전 경기장에 도착하면 어떤 개인운동을 하는가?
고관절을 시작으로 여러 부위의 스트레칭을 다 하고 간단하게 드리블, 슛을 한다. 1대1로 수비수가 있는 상황에서 던지는 슛을 마지막으로 하는 게 루틴이다. (슛 연습은 개수나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건가?) 그건 아니다. 5개 구역을 돌면서 던지는데 따로 정해놓은 건 없다. 감이 좋다 싶으면 끝낸다. 감이 안 잡히면 찝찝하지만, 그렇다고 많이 던지는 게 좋은 건 아니더라. 감이 안 잡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가까운 위치에서부터 다시 던지며 감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데뷔 후 꾸준히 3점슛 성공률이 상승하고 있는데 슛 자세에 변화가 있었나?
바뀐 건 전혀 없다. 자신감 차이인 것 같다. 지난 시즌까진 상대가 새깅디펜스를 할 때 망설였다. 던져야 할 때 안 던지다 보니 팀 공격이 다 꼬였다. 올 시즌 초반에는 새깅이 더 깊어졌는데 안 들어가더라도 던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도 붙으며 자연스럽게 슛 감이 올라온 것 같다. 이제 수비가 있어도 주저하지 않는다. (수비가) 좀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웃음).
자신감은 결국 노력한 만큼 생길 텐데?
새벽은 물론 오전, 오후 팀 훈련 모두 1시간 전에 나와서 개인운동을 했다. 개인운동 할 때도 경기에서 던지는 것처럼 하려고 한다. 어떤 선수든 노력은 다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력한 걸 실전에서 해봐야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경기에서 자신 없게 1, 2개 시도하는 선수들을 보면 아쉽다. 후회 없이 해봐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개를 넣는다는 것보단 5개 이상 던지자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러다보니 슛 성공률도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 같다.
경기 전부터 그렇게 땀을 흘리면 실전에서 안 지치나?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심적으로 편하다. 물론 루틴은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지금처럼 준비하는 게 몸에 맞는다. 아직 체력도 좋고, 경기 준비할 때 마음가짐도 새롭게 할 수 있다. 개인훈련을 열심히 해야 불안함 없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
체력은 어릴 때부터 타고났나?
많이 타고 났다. 큰 부상도 없었다. 물론 항상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경기할 때 힘들다. 너무 힘든데 요샌 농구하는 게 재밌다. 훈련 때 했던 걸 경기에서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훈련을 더하게 되고, 그러면 경기를 더 치르고 싶다. 승부욕이 강한 것도 체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산 오르는 것도 무조건 1등이어야 했다. 힘든 걸 티 안 내며 고비를 넘기다 보니 체력도 좋아진 것 같다.
오전 9시에 원정 내려가면 7시 30분에 내려와서 개인운동 다 한 후 버스에 탄다고 들었다.
보통 1시간 정도 한다. 지방으로 내려갈 때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는데 너무 무겁게 하진 않는다. 밸런스를 잡는 정도만 한다. 이후 사우나까지 마치면 개운하다. 그 상태로 내려가는 게 도움이 된다.
낮잠은 얼마나 자나?
안 잔다. (설마 낮잠시간까지 운동하나?) 그건 아니다(웃음). 낮잠 자고 일어나면 몽롱하기도 하고, 밤에 일찍 자는 편이기 때문에 낮에는 최대한 안 자려고 한다.
노력을 많이 하는 선수로 유명한데 ‘이런 노력까지 했다’라고 자부할 만한 것도 있나?
시즌을 치르는 동안 특별히 하는 건 아니다. 너무 과하면 독이 된다고 들었다. 대신 오프시즌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자부할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농구하고, 음식 관리도 한다. 야간에는 운동을 안 한다. 철저히 회복에 신경 쓰고, 쉴 때도 농구를 본다. 내 생활의 모든 포커스가 농구에 맞춰져있다고 보면 된다. 팀 소집 전 60일이 농구가 많이 늘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때 농구를 정말 많이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농구를 하다 보면 배울 게 또 생긴다.
슛이 약하다는 주위의 평가가 부담이나 스트레스로 연결되진 않았나?
부담은 없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만 있었다. 우리 팀은 내가 아닌 자밀 워니가 중심이 되어 끌고 가는 팀이다. 그런 얘기보단 3명 다쳤다고 국내선수 전력이 약해졌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다들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선수들이고, 내가 이 가운데 선봉장이 되고 싶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이관희(LG)가 마네킹에 비유하며 도발했다. 선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솔직히 얘기하면 별 생각 없었다. (최)원혁이 형, (최)성원이 형과 얘기해봤는데 모두 비슷했다. 다만, 서로 내색 안 했을 뿐 경기에 임할 땐 독기를 품었을 것이다. 어쨌든 도발을 한 거니까 ‘우리는 말없이 보여주면 된다’라는 마음이었다. (승부욕이)끓긴 했던 것 같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수비에 임하나?
프로에 왔을 때부터 스스로 자신 있다고 생각한 부분이었다. 최근에 많은 시간을 소화하다 보니 길도 더 보이는 것 같다. 데뷔 4년 차여서 팀 수비도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눈에 들어오고, 개인적인 수비력도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파이트스루를 잘하는 비결이 있다면?
다른 가드들에 비하면 힘이 좋은 편이다. 밀리지 않게 먼저 압박을 강하게 하려 한다. 사실 파이트스루는 내 약점이었다. 감독님도 픽앤롤 수비가 약하다고 말씀하셨다. 스크리너에게 계속 부딪친다고 지적하셨다. 그래서 오프시즌에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 이제는 감독님이 수비할 때 별다른 지시를 안 하신다. “슬라이스든 파이트스루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셔서 믿음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수비는 어릴 때부터 잘했나?
처음 농구를 볼 때부터 양동근 코치님의 수비를 좋아했다. 공격하는 선수가 헤매는 게 인상적이었다. ‘양동근 선수처럼 수비를 잘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남들 슛 던질 때 수비 훈련을 더했다. 사다리도 많이 탔다.
수비5걸 선정이 지난 시즌을 끝으로 폐지됐다. 어쩌면 마지막 수비5걸 수상자 중 1명으로 남을 수도 있는데 아쉽진 않나?
한 번도 못 받았다면 굉장히 아쉬웠을 것 같은데 우수수비상이 없어진 건 아니다. (문)성곤이 형이 4시즌 연속으로 수상한 우수수비상을 따내는 게 목표다. 지난 시즌에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뛰었다. 최근 워니가 “그렇게 수비하면 안 돼. 출전시간 많고 경기운영도 해야 하니까 팀 상황에 맞춰 수비는 조금 내려놔”라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비로 살아남은 만큼, 남은 시간을 못 뛰더라도 투입이 되면 수비에 모든 걸 쏟고 싶다. 그러다 보면 타이틀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농구는 언제 시작했나?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운동회에서 뛰는 모습을 본 다른 학교 코치님이 제의하셨다. 어릴 때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야구, 축구 하다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절대 시킬 생각이 없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뭐라도 운동을 하긴 하겠구나’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어릴 때나 현재 롤모델은?
딱히 정해둔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워낙 NBA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많다. SPOTV NOW 결제해서 제일런 브런슨(뉴욕), 디애런 팍스(새크라멘토) 등 왼손잡이 가드들의 경기를 챙겨보는 편이다. 인상적인 걸 따라서 연습하다 보면 경기에서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격옵션도 다양해진 것 같다.
원래 왼손잡이였나?
그렇다. 글만 오른손으로 쓴다. 사인해줄 때 팬들도 놀라더라. 원래 글씨도 왼손으로 썼는데 어머니가 다른 건 괜찮아도 글은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고 하셨다. (윙스팬은?)198cm다. 가드 가운데 선형이 형(195cm)도 긴 편이데 내가 조금 더 길다.
부산성남초에서 성남중, 그리고 연계학교가 아닌 경복고로 진학한 게 특이하다.
중학교는 부산동아중에 입학했는데 코치님이 그만두셨다. 그러면서 나를 성남중에 추천해주셨고, 원래 서울로 올라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징계를 감수하며 전학 갔다. 고등학교는 낙생고로 진학하는 게 맞았지만, 경복고는 누가 봐도 명문이다. 경복고에서 운동을 하면 농구가 더 늘지 않을까 싶어 결정했다.
경복고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의 선수였나?
바닥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후보였고, 3학년 때만 조금 더 뛰는 정도였다. 스포트라이트는 늘 친구들이 가져갔다.
한양대도 어렵게 입학했다고 들었다.
입시전형이 바뀌었다. 기록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기록 자체가 없으니 갈 수 있는 대학도 없었다. 친구들의 연고대 입학이 확정됐을 때도 나만 결정이 안 됐다. 부모님도 농구인이 아니다 보니 당한 부분도 있었다. 원서 마감 이틀 전 대학을 못 갈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얘기에 많이 우셨다. 나도 그때 ‘농구인생 끝이구나’ 싶었다. 양동근 선배님의 모교여서 한양대에 원서를 넣었는데 가드 경쟁률이 거의 10대1이었다. 안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다른 학교는 고민도 안 하고 바로 한양대에 갔다.
대학 시절에는 3점슛 시도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땐 무조건 돌파, 수비였다. 대학은 아무래도 분석이 디테일하지 않다보니 상대가 새깅을 안 했다. 그래서 무리한 3점슛보단 돌파, 수비에 이은 속공 위주로 공격했다.
다른 직업을 생각한 시기도 있다고 했는데?
드래프트를 준비할 때였다. 기왕 농구를 시작했으니 프로까진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면?) 군대에 가지 않았을까. 일단 병역부터 해결하고, 군대에 있는 동안 뭘 해야 할지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농구만 해왔으니 다른 직업을 구체적으로 고민했던 건 아니다.
농구 외의 취미는?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안 좋아한다. 조용하게 영화관, 한강,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기 빨린다(웃음). 쉴 때는 조용한 곳에서 쉬는 게 좋다. (경기장은 관중도 많고 시끄러운데?) 그건 완전히 다르다(웃음). 2시간 30분 전 경기장에 가는데 팬들은 3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려주신다. 경기 전 팬들이 준 편지를 읽으면 힘이 난다. 내가 홈경기 기록이 더 좋은 이유도 많은 팬들이 와주시기 때문이다.
얼리엔트리로 드래프트에 참가했던 배경은?
동기 중 동갑내기 친구(김민진, 175cm)가 있는데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1번, 내가 2번을 맡았다. 아무리 봐도 나는 2번이면 프로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1번을 맡아야 프로에서 나를 봐줄 것 같았는데 그 친구가 3학년 때 시즌아웃됐다. 그래서 3학년 때 1번을 맡았지만 4학년이 되면 다시 2번을 소화해야 했다. 얼리엔트리로 나가는 게 나에게도, 그 친구에게도 맞다고 생각했다. (정재훈) 감독님을 비롯해 다들 말리셨지만, 나와 부모님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사실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얼리엔트리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프로에서 번 돈으로 (빚을) 메우고 있는데 이제 끝이 보인다. 이것부터 빨리 해결하고 싶다.
지금은 규정상 금지됐지만, 당시 SK가 자체 워크아웃 형식으로 테스트한 선수 가운데 1명이었다. 워크아웃은 잘 치렀나?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긴장을 많이 하고 갔는데 같이 임한 선수들은 더 긴장했더라(웃음). 1대1, 3대3, 속공, 수비 등 내 장점을 다 보여줬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 않았다. (지명될 거란 예상도 했나?) SK가 1라운드 10순위, 2라운드 1순위였는데 내가 그 정도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는 하고 있었다.
실제 지명됐을 때 기분은?
1라운드에 지명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그런데 1라운드 지명이 끝난 후 회의하기 위해 주어진 5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막상 이름이 불리니 아쉬움이 다 사라졌다. 돌아보면 좋았던 기억밖에 없다. 2라운드에 지명돼 데뷔 후 더 부각된 걸 수도 있다.
데뷔 경기에서 팀은 패했지만, 6분 48초만 뛰고도 6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 2스틸하며 눈도장을 받았다.
모든 상황이 기억난다. 자유투로 첫 득점 올렸는데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준형이 형의 공을 스틸한 후 득점에 추가 자유투까지 얻어내니 ‘이게 뭘까?’ 싶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재밌고 흥분됐다. 추가 자유투는 두 번 모두 놓쳤지만, 그 경기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팀이 많이 지다 보니 분위기도 안 좋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도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 팀이 연패 중이어서 힘들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득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평생 한 번뿐인 신인상을 수상했다.
너무 받고 싶었다. MVP나 우수후보상은 언제든 도전할 수 있지만, 신인상은 한 번뿐이지 않나. 팀에서 만들어준 부분도 있다. 시즌 막판에 나를 더 밀어주셔서 감사했다. (믿고 쓰는 한양대 가드라는 말도 있는데?) 양동근 코치님을 비롯해 (이)재도 형, 원혁이 형, 그리고 나까지 모두 악바리 근성이 있다. 워낙 열심히 뛰는 형들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내가 안일해지면 안 된다는 마음도 갖고 있다.
자신감을 갖고 맞이했을 2년 차 시즌에 팀은 통합우승을 했지만, 출전시간은 오히려 줄었다.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아 아쉽긴 했다. 팀 전력이 워낙 좋다 보니 내가 원하는 농구만 할 순 없었다. 원혁이 형도 감독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신인상 수상한 선수가 바로 다음 시즌에 이렇게 됐다는 점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훈련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상무에 지원했지만 체력 테스트를 받으러 가지 않았던 이유는?
출전시간이 적다 보니 군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붙잡으셨다. 더 배우고 가는 게 나을 거라 말씀하셔서 남게 됐다.
신인상, 대표팀 최종엔트리 중 무엇이 더 기뻤나?
당연히 대표팀이다. 모든 농구선수들의 최종적인 꿈이다. 어릴 때부터 어떤 대표팀도 예비엔트리조차 포함되지 못했던 나로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늘 대표팀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간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대표팀 유니폼을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 대표팀 유니폼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설레고 떨린다.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만, 농구를 잘하는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경험일 것 같다.
국가대표로 임하는 각오는?
나는 KBL도, EASL(동아시아 슈퍼리그)도 항상 매 경기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뛰었다. 국가대표는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해서 뛰는 것이고, 모든 한국 팬들의 응원도 받는다. 지금까지 뛰었던 것 이상으로 뛸 것이다. 처음이라 서툰 부분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뛸 테니 많은 응원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지금보다 열심히 뛰는 게 가능한가?)국가대표는 쉽지 않은 자리니까 더 많은 힘이 나오지 않을까. 자주 있는 기회도 아니다. 예선 2경기를 정규리그 54경기처럼 쏟아 붓겠다. 대표팀에서 의지할 선수로 꼽았던 최준용은 결국 부상으로 제외됐다. (최)준용이 형도 너무 아쉬워 하셨다. 방 같이 쓰면서 여러 부분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미안하게 됐다고 하셨다. 통화는 많이 하고 있다. 어떻게 하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한양대 3~4학년 시절 등번호는 7번이었는데 프로에서 22번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7번은 입단할 때 (변)기훈이 형 등번호였다. 드래프트 끝난 후 10분 만에 등번호 정하라고 하시더라. (임)현택이 형이 21번 하셔서 아무 생각없이 22번을 골랐다. 돌아보면 7번을 썼던 아마 시절은 안 좋은 기억뿐이지만, 22번은 좋은 기억밖에 없다. 신인상, 우승, 대표팀까지 경험했으니 나에게 맞는 번호인 것 같다. 대표팀에 뽑힌 선수 중에도 22번은 나밖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 22번을 쓰지 않을까 싶다.
향후 선수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노력하는 선수라는 것을 인정받아 너무 좋다. 잘하는 선수보단 힘든 시기를 거쳤어도 노력하다 보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 2학년 때까지 매년 농구 그만둔다고 했었다. 짐 싸서 나간 적도 많았는데 코치님들이 잡아주셨다. 믿어준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아마에는 힘들어하는 선수가 많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을 텐데 그들이 나를 보며 힘을 얻었으면 한다.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구나.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구나’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야 내가 하는 이 말에도 힘이 실릴 거라 생각한다.#사진_박상혁 기자, 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기자)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